자리에 걸맞은 인사

by LogCabin, 2025

[English]


사람은 인사를 하기 전에 자신의 위치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일을 스스로 떠맡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지하철 좌석에서의 짧은 상호 인식의 순간, 혹은 수요일 오후 수업에서 지인을 마주칠 때—이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본격적인 대화의 황금빛 회랑을 방황하지 않는다. 매일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응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순진하고 오만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간과하지만, 인간은 다른 이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즉 우리 사회의 기초이자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가진 성향이라는 실재를 참고해야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위치를 생략한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 있게 '인사'라고 부르는 그 말은 도대체 입 밖으로 어떤 형식으로 나오는가? "안녕하세요." 운이 좋으면 "좋은 하루 되세요" 혹은 "잘 지내세요?" 정도가 덧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러한 변주들은 결국 "안녕하세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를 담고 있다. 서로의 존재를 묵묵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확인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른바 '인사'들은 오히려 실질적인 내용이 오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최소한의 목적만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내용'은 결코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상태다. 운동장을 달리기 위해 나선 날, 제자리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은 그날의 의도와는 전적으로 어긋나 있기에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다. 다리를 움직이고, 땅을 구르고, 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몸의 모든 움직이는 부위를 민감하게 의식하게 되는 그 상태야말로 달리기의 불가피한 결과이자, 바로 그 행위 자체의 '내용'이다. 정지된 불변성에서 벗어나 덧없고 반복적인 현재의 상태로 진입하는 이 전이적 성격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실질성을 정의한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몸은 달리기의 현실적 국면을 흐르듯 통과하고, 바로 그 구체적인 행위의 목적이 그 과정 속에서 태어난다. 현재는 결코 스스로 존재하는 법이 없고, 반드시 '비-현재적인 내용'을 통해 흘러야만 그 목적을 드러낼 수 있다.

"안녕하세요!"라는 정형화된 행위에는 그러한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그것을 말하는 이가 자기 상태를 변화시키려는 의도와 행위를 생략함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만의 방이라 부를 수 있는 조용한 공간에서, 진심으로 대화를 원하는 상대와 마주하고, 그 만남을 서로 즐거워하는 그런 계기 속에서라면, 인사를 주고받는 친구들 사이에 상태의 전이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익숙한 아침 출근길, 겨우 한 잔의 물과 커피로 연명하고 있는 그 상태에서는, 자신의 엔트로피적 상태를 흔드는 어떠한 시도도 그다지 유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람은 "안녕하세요"라고 전하며, 심지어 그 말이 주변 사람들의 귀에도 들리기를 바라며 말할 수도 있다. 말의 대상이 그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의무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그 어떤 측면도 실제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