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아카이브 최종편 - 어른의 책임을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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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카이브 최종편 - 어른의 책임을 지고
九重¹*, translated by l'été (Garden)
¹note.com
Contents
모티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존재
「색채」의 도래: 『복제 금지(不許複製)』로부터
「시로코」라는 시니피앙 (기표),「아누비스 신」이라는 시니피에 (기의) ⁠1
인간으로서의 고뇌: 「색채」 혹은 「세계」라는 칸트적 물자체에 의한 규정 ⁠1
미소노 미카: 학생과 우리를 잇다 ⁠1
「기적」: 나의 발견법 ⁠1
아리스 (『태엽 감는 꽃의 파반느 편』) ⁠1
미카(『에덴 조약편』) ⁠1
어른의 책임: 누가 요구했는가? ⁠1
어른의 책임 실천 ⁠1
어른의 책임 실천 (2) ⁠1
선생 (4th PV) ⁠1
아리스 TO 리오, 케이 (『최종편』) ⁠1
References ⁠1

—바톤을 건네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블루 아카이브 최종장에서의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선생이 사용하고 있던 '어른의 카드' 가 — 비장의 '카드' 에 대한 메타포가 아닌 — 인터넷 상에서의 어른의 게임 과금 방식을 나타내는 '신용 카드' 를 그대로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세계선의 선생인 프레나파테스가 '어른의 카드' 를 사용하는 모습에서 주인공 측 선생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고, 선생과 플레이어는 겹쳐지는 존재임을 블루 아카이브는 강하게 묘사해 온 것이었다.

또 최종편의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가운데, 프레나파테스가 이 세계선을 파괴하러 온 이유는 시로코 테러와 프라나 (프레나파테스의 싯딤의 상자의 OS) 를 다른 세계선의 선생에게 맡기는 것이었다고 판명된다. 이 세계에 다다른 이유는 '색채의 인도자'의 몸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형태가 되지만, 자신이 실패한 것을 극복한 세계선에 있는 자신이라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는 세상을 뜨기 전에 선생에게, 「학생들을…잘, 부탁드립니다」 라 말하고 폭발에 삼켜진다.

프레나파테스가 맡은 상대는 다른 시간축의 자신이었지만, 선생이 플레이어와 겹쳐지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나에게도 바톤이 던져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전부터 열심히 학생들을 이끄는 선생님의 모습에는 감화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모티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존재

블루 아카이브의 캐릭터들은 그 디자인에 모티프나 그와 유사한 존재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메인 시나리오에서 특히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예를 들자면, 호시노는 「호루스 신」, 시로코는 「아누비스 신」, 앨리스는 「이름 없는 신들의 왕녀」, 미카는 「미카엘」일 것이다.

한계 돌파 아이템의 이름이 「테트라그라마톤 – 신명문자(神名文字)」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든 캐릭터는 신이나 천사, 악마 혹은 그에 준하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으며, 그녀들은 그 '알'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그녀들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가――캐릭터 디자인이 만들어질 때――일방적으로 그녀들에게 부여한 것에 가깝다.

메인 스토리에서는 그녀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강제로 부여받은 특성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호시노는 「신비」를 탐구하는 검은 옷을 입은 이들에게 납치당하고, 아리스는 리오에 의해 위험 회피를 위해 제거될 뻔한다. (미카는 그 위치가 특수하므로 이후에 언급할 예정이다.)

최종편에서는 시로코가 다른 시간축의 「공포」로 변해버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시로코는 격분하며 저항하지만, 시로코 테러에게 「너는 바로 이것(죽음의 신)이다」라는 언명을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그런데 다른 시간축에서 시로코가 「공포」화한것은, 「색채」를 접한 것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색채란 무엇일까.

「색채」의 도래: 『복제 금지(不許複製)』로부터

게마트리아의 골콩트와 데칼코마니는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를 모티프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색채」의 도래에 관해서는, 바로 그 르네 마그리트²의 작품 『복제 금지(不許複製)』가 답을 향한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는 한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도 뒤돌아서 있기에 이상한 그림이라고 감상자는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이 작품이 그 자체로 '정상'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떠오른다. 나는 감상자로서 거울에도 같은 사람의 뒷모습이 비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 속 인물은 그게 자신의 뒷모습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깨닫게 하려면, 그림 속 인물에게 "거울에 비친 뒷모습은 당신 자신입니다"라고 알려줄 수밖에 없다. 이 '알려주는 행위'가 바로 「색채」의 도래일 것이다. 즉, 관측자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리고 「색채」란 「메타 지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색채」 자체에는 「의지」도 「선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색채」의 도래로 인해 키보토스가 멸망하는 것은, 키보토스 자체가 게임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메타 지식을 키보토스 내부가 확신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쩌면 누군가의 소설 속 등장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을 떠올려 보면 된다.

시로코가 「공포」로 변해버린 조건 자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색채」에 접촉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메타 지식으로서의 모티프인 「아누비스 신」이라는 해답이 그녀에게 주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로코」라는 시니피앙 (기표),「아누비스 신」이라는 시니피에 (기의)

「색채」의 도래를 전제로 하는 모티프와 학생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명의 사제가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바 있다. 이를 시로코에 맞춰 재구축해보자.

「아누비스 신」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현실적인) 존재를, 「아누비스 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여(=상상적으로), 그 모티프에 따라 만들어진 「시로코」라는 존재로 포착하려는 시도다. 이때, 「시로코」라는 존재는 상징적으로 「아누비스 신」과 일대일로 대응하는(=기호) 또는 은유적 관계로 존재한다.

결국 「시로코」는 「아누비스 신」을 강림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매개체(依り代)'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재적 논리는 「시로코」라는 존재가 개념적으로 「아누비스 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신을 강림시키기에 충분한 존재가 된다는 로직이다. (비슷한 것은 서로 끌린다는, 상징계를 통한 일종의 '마법적 논리')

또한 「시로코」는 무명의 사제에게 있어, 신의 강림이 성공한 시점에서 신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된다. 사제가 선생을 향해 「우쭐대지 마라」고 소리친 것은, (사제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매개체에 불과한 시로코의 '개별성'을 선생이 강조하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한편, 「공포」라는 형태로 신이 강림하고「색채」가 도래하는 조건 중 하나는――내부 논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관찰된 사실에 따르면――삶은 「고통」이라는 사고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고뇌: 「색채」 혹은 「세계」라는 칸트적 물자체에 의한 규정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해를 얻을 수 있는가

— 제리코의 고칙(古則) 제2조 (원문 그대로 인용됨)

본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리코의 고칙 제2조. 스토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구절은 여러 차례 반복되어 사용되며,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의미가 바뀐다. 이러한 격언의 반복적 사용은 「의미는 다의적일수록 좋다」는 프랑스적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또 싫어할 것이다.

이 고칙을 「색채」와 존재의 물음에 적용해보자. 즉, 「색채」의 도래를 통해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다.

「색채」의 도래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나는 인간이라는 사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여성이라는 사실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시로코에게 있어서 「아누비스 신」이 자신의 모티프라는 사실 또한 바꿀 수 없는 진실이다. 이해는 없고, 오직 사실만이 존재한다. 그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칸트 철학에서 「물자체(物自体, Ding an sich)」로, 낭만주의 철학에서는 「우주의 의지」로 불린다.

여기에 하나의 문학적 보충을 덧붙이자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캇파(河童)』에 나오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캇파의 세계에서 아기 캇파는 태어나기 전에 부모에게 태어날 조건을 듣고, 그 조건에 동의해야만 태어난다. 동의하지 않으면 그 생명은 거부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이 설정을 우리의 세계와 비교해보자. 우리는 어떠한 동의도 없이, 정해진 조건 속에 강제로 이 세계에 태어난다.

이렇듯, 동의 없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에게 「색채」의 도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 일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일방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일 뿐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고통에 지배당한다. 시로코 테러는 바로 그 고통을 온몸으로 외치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로코 테러에게는 몇 가지 (심리적) 방어 기제가 관찰된다. 예를 들어, 호시노 일행을 피하려는 듯한 도피 행동이나, 프레나파테스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였다」고 단언하는 태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딘가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색채」에 의한 규정(=「아누비스 신」)에 아비도스 고등학교 학생으로서의 시로코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시로코에게 있어, 만약 자신이 「아누비스 신」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일부여야 할 「아비도스 고등학교 학생으로서의 나」와 선생님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감정이 「나」로부터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분열은 언어에 의해 찢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즉 '언어적 존재(= 話存在)'가 가진 고유한 고뇌다.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는 바로 「주체의 분열(Spaltung)」이라 할 수 있다. 블루 아카이브의 표현을 적용해 보자면, 자신의 정체성이 「뒤틀리고 비틀려」버린 상태다.)

프레나파테스 선생의 시간축에서 일어난 사건이 「뒤틀리고 비틀린 끝의 종착점」으로 묘사되는데, 실은 가장 먼저 「뒤틀리고 비틀린」 것은 다름 아닌 학생들 자신이었다.

프레나파테스 선생은, 이러한 시로코를 향해 말을 건넨다. 그녀가 다시 개인으로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것(아누비스 신)은 네가 아니라고.

이 이야기는 게임 속 캐릭터에게 일어난 갈등일 뿐이고, 실제 인간과는 다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색채」에 의해 '찢겨나간다'는 경험 자체는――정신병적 주체를 엄밀히 제외하더라도――누구나 한 번쯤 겪은 적 있는 일일 것이다.

정신분석이라는 분야에서 「성(性)」이 중요한 요소로 다뤄지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찢김' 현상에 있다. 가령, 육체와는 별개로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정신에 성별이 있을까? 성별은 육체적 조건에 의해 부여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캇파"가 아니기에, 태어나기 전에 성별을 선택할 수 없다.

'나의' 생물학적 성별은 「색채」의 도래처럼 외부에 의해 강제로 주어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지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돌트(Dolt)는 이러한 성적 분열을 '일차적 거세(一次去勢)'라 명명한 바 있다.

블루 아카이브가 이러한 '찢겨나가는 인간의 고뇌'를 묘사하는 방식은, 최근의 캐릭터 양산형 '모에화' 트렌드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antithèse)라고 볼 수 있다. 이 캐릭터들 또한 "캇파"처럼 자의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기에, 강제로 주어진 모티프를 인간으로서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태어나서 이름을 부여받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에 대해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는 주체의 분열로부터 오는 불편함과 일맥상통한다.

블루 아카이브의 뛰어난 점은, 이러한 인간적 고뇌를 다룰 때 『아이돌마스터 샤이니 컬러즈(シャニマス)』처럼 현실적이고 기호화되지 않은 생생한 인물을 그리는 대신, 상대적으로 기호화되어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편한 성격의 캐릭터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캐릭터들의 배후에는 외부적 규정으로서의 모티프, 즉 '물자체(物自体)'를 배치하여, 바로 그 모티프로 인해 찢겨나가는 인간의 상황을 연출한다.

겉보기에는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외부적 규정과 내적 주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바로 블루 아카이브의 서사적 강점이라 할 수 있겠다.

미소노 미카: 학생과 우리 사이의 연결점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고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여기까지의 논의는 결국 모티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의 내부적 갈등에 불과하며, 현실의 인간이 느끼는 고뇌와는 다소 괴리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의문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실제로 시로코처럼 자신에게 '아누비스 신'이라는 모티프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전에 언급한 성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우리 같은 방황하는 어린 양들이 종종 경험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비록 「색채」(확정적인 메타 지식) 자체는 아니지만, 사회와 타인의 시선 속에 마치 '색채'와 같은 절대적 규정이 존재한다고 착각하며 휘둘리는 경험이다. 이와 같은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캐릭터가 바로 미소노 미카(聖園ミカ)다.

미카의 모티프는 '미카엘'――즉, 「신을 닮은 자」다. 하지만 그녀의 위치는 독특하다. '미카엘'이란 본디 천사이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주위의 영향을 받는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그리고 작중의 미카 역시 그와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

메인 스토리의 『에덴 조약편』에서는 미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휘둘리며, 마치 「색채」처럼 느껴지는 대상에 끌렸다가 멀어지는 모습이 세심하게 묘사된다. 그녀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미지――부모나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 혹은 외적 우연과의 일관성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허상――를 「색채」의 도래로 착각하고, 그에 따라 자기 규정을 이리저리 바꾸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아래에 언급된 글을 참고하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해당 글에서는 미카의 내면적 변화 과정을 언어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증명의 불가능성에 맞서는 수단이자 명목으로 《기록》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주관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2장까지는 가볍게 훑어보는 정도로 충분하다.)

https://note.com/kokonoe407/n/n1dd29009f473

참고로, 「미카엘」 및 기독교적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심층적인 분석은 아래에 소개된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비록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미카에 대한 해석은 나와 일치한다.

https://iyoiyo1240.hatenadiary.com/entry/2022/12/09/205549

블루 아카이브는 미카에게 상당한 공을 들였다. 메인 스토리 중 '에덴 조약편'만이 — 다른 편이 최대 2장까지 있는 데 비해 — 4장까지 이어졌으며, 게다가 4장은 사실상 거의 미카의 구원을 다루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그녀의 존재 방식이 플레이어의 마음을 사로잡을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 엿보인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보아도, 인기가 높아진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색채'의 도래를 통해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색채' 그 자체가 아닌, '색채'처럼 느껴지는 무언가의 도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미카의 '에덴 조약편'에서의 혼란스러운 여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또한 부정의 답이며, 고통스러운 여정이 된다.

한편, 블루 아카이브는 '색채'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답의 방식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기적'이라 불린다.

「기적」: 나의 발견법

그러니― 돌아가요, 선생님. 우리 모두의 「기적」이 있는 곳으로.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타인(もの)을 통해, 자신(たが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 총학생회장, 최종편 『그리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

「기적」이라는 단어는 꽤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기적」이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로, 학생들이 '비틀리지 않고' 있는 상태, 혹은 '비틀리지 않은' 학생 자신을 의미한다. 맥락에 따라서는, 그러한 상태의 학생이 초래한 상황까지 포함하여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최종편의 마지막 『그리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총학생회장이 이 「기적」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예리코의 고칙(古則) 제2에 몇 가지 요소를 추가한다. 그 요소는 「타인」, 「존재의 물음(=자신에 대한 이해)」, 「상호성(=서로)」이다.

이 확장된 고칙을 적용할 수 있는 관계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로코 테러에 주목하고 싶다. 시로코가 시로코 테러에게 건넨 「은행강도」 가면이 매우 상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가면에는 대책위원회의 일원이라는 연결고리와, 개인으로서 ‘은행강도’라는 수단도 마다하지 않고 실행해내는 시로코다운 모습이 담겨 있다. '은행강도' 가면을 통해 자신다움을 되찾는다는 것이 얼핏 황당해 보일 수 있지만, 자신다움이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되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아마도 힌트일 것이다. 「기적」에 이르려면 「내적 충동(‘이렇게 되고 싶다’거나 ‘이걸 하고 싶다’는 마음)」을 (「색채」보다도) 우선시하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적 충동」의 발생과 연결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동체(가족 같은 친밀한 집단) 의식」이다. 나는 나의 위치를, 나를 둘러싼 공동체 속에서(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찾아낼 수 있다.

내가 발견하고 우선해야 할 나 자신은, 위에서 내려오는 메타 지식(「색채」나 「색채」처럼 느껴지는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가 나란히 있는 ‘옆’에서 찾아야 한다. 「기적」의 조건은, 바로 이 ‘옆’에서 발견되는 나 자신을 반드시 우선시하는 것이다.

이제, 메인 스토리에서 보여졌던 「기적」들을 살펴보자.

아리스 (『태엽 감는 꽃의 파반느 편』)

아리스, 혹은 「AL-1S」는 「이름 없는 신들의 왕녀」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러나 「KEY」와는 달리, 아리스는 자신에게 그런 사명이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임 개발부가 인력 부족으로 폐부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황에서, 아리스는 선생님과 게임 개발부의 멤버들에게 따뜻하게 환영받는다. 또한, 「용사」로서 학원 내를 활보하는 그녀는 게임 개발부뿐만 아니라 밀레니엄 학원 내에서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리오에게 자신이 「이름 없는 신들의 왕녀」, 곧 「마왕」이라고 지적받은 후, 아리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모모이를 다치게 한 것에 괴로워하며, 모모이와 친구들을 생각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내린다.

그러나 선생님과 게임 개발부는 끝까지 아리스를 찾아내어, 민폐라 생각지 않는다고,「네가 누구인지는 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인걸」「네가 되고 싶은 존재는, 네가 직접 정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배려하며 자신을 희생하려 했던 아리스에게, 공동체 측에서 오히려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도 괜찮다 고 강하게 말해준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아리스는 자신이 「용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솔직히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아리스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자신"을 긍정해주었기에, 마침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카(『에덴 조약편』)

경위는 복잡하니 생략하지만, 『에덴 조약편』 4장에서 미카는 앨리스에게 있어 「마왕」에 해당하는 두 가지를 품고 있다. 하나는「마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행의 원인」=「역병」 이다. 미카는 사오리를 「역병」, 즉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로서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카는 사오리와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사오리가「나는 불행의 원인이기에, 오히려 행복해지고 싶다고 바란다」고 말했을 때, 미카는 사오리 안에서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바라던 자신을 발견한다. 이 깨달음을 통해, 사오리는 미카에게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는 존재로서 일종의 '가족' 같은 유대감을 지닌 인물이 되었다.

이후, 선생님이 미카 앞에 나타나 그녀에게 「넌 마녀가 아니야」 라고 말을 건넨다. 마음을 가다듬은 미카는 사오리가 아츠코를 구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홀로 발할라를 향해 나아간다. 그 순간, 그녀는 사오리에게 강하게 자신을 투영한다.

수많은 사람을 속이고, 절망에 빠뜨린 당신이라 해도……

마지막 순간, 누군가를 구할 수 있었다면……

고통으로 가득한 당신의 삶도, 그것만으로 보상받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거지? 나도 알아―나와 세이아도 그랬으니까.

— 미카

그녀의 거울 이미지와도 같은 사오리가 아츠코를 돕고, 그를 통해 구원받기를 미카는 진심으로 기도하며, 용서하고, 그 길을 지켜보는 자신을 자리에 위치시킨 바로 그 순간. 미카는 조용히 입을 연다.

「축복이 있기를―」

그와 동시에, 고장난 줄로만 알았던 축음기에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가 흘러나온다.

(전략)

(미카는)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아리우스 스쿼드를 위해 기도와 말, 그리고 성가를 조용히 읊조린다.

점점 늘어나는 성도회(聖徒会)를 앞에 두고 찬송가를 부르는 그녀의 등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 소녀를 위한 키리에(1):줄거리 「마녀」나 「역병」이라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말에 의해서가 아닌, 사오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의 초석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였을 때, 다시 말해, 가족 같은 이들에게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했을 때, 미카는 비로소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마음속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찾아내어, 구원받았던 것이었다.

어른의 책임: 누가 요구했는가?

「기적」이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선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의 책임이란, 학생들이 「비틀림」(捻れ)을 겪지 않도록, 혹은 「비틀림」을 해소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이를 "책임"이라는 말로 언급하는가 하면, 이는 (책임을 다하지 않을 경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과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학생들(혹은 아이들)에게 우리는, 설령 같은 나이라 하더라도, 이미 타자로서 「색채」처럼 느껴지는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강제로 참여 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게임판 위에 올려져 있는 존재 이며, 판 위에서의 태도와 역할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 말은 곧, 학생들이 비틀리게 할 수도, 그 비틀림을 풀어줄 수도 있는 자리 에 우리가 이미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블루 아카이브는 우리에게 그 태도를 강력히 묻고 있는 것이다.

이후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선생님의 대응을 보면,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먼저 학생들이 자신의 내적 충동을 우선하도록 이끌어주는 일. 그리고 「색채」나 「색채」처럼 느껴지는 것에 지나치게 압도되지 않도록, 이를 적절히 다룰 수 있는 자리를 안내하는 일. 마지막으로, 내적 충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공동체(身内)를 향해 학생을 초대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발견하게 돕는 일.

학생들은 자신의 내적 충동사회가 요구하는 태도 사이에서, 내적 충동을 우선해도 된다는 언명에 노출되지 못하면, 그것을 우선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대개는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억제'를 요구받을 뿐이며, 이를 거부하면 처벌받거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 에 직면한다. 결국 내적 충동을 억누르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

이 시점에서 결정적 분기점이 발생하는데, 내적 충동을 억제하고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을 '비틀고 왜곡'하는 길 과, 내적 충동을 긍정하면서도 사회의 요구와 균형을 맞추는 길 이다.

이 두 선택지 사이에는 엄청난 단절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 분기점에서 삶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기 때문이다.

이 선택 하나로, 삶을 '고통과 괴로움(負)'으로 인식할지 혹은 '기쁨과 즐거움(正)'으로 받아들일지를 결정짓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고통(負)'으로만 바라보게 된 학생이 있다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은 억압을 요구한 쪽, 즉 어른들의 책임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어른의 책임 실천

학생이 「뒤틀리거나 왜곡」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충동을 긍정하면서도 요구와 능숙하게 잘 어울릴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춰 설 수 있도록 돕는 실천을 살펴보자.

알기 쉬운 실천의 한 가지로는 「색채」나 「색채」와 같은 것을 분리해내는 말을 건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울면서 무너져 내리던 시로코 테러에게 네가 「아누비스 신」이 아니라, 그 이전에 「순수하게 운동을 좋아하는… 시로코야」라고 말했던 것처럼.

한편, 다소 기술적이고, 학생이 교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기 어려운 실천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학생 스스로 자신의 내적 충동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라캉파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기법으로써) 「(정신적) 방어가 아닌, 충동을 해석하기」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시로코 테러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녀는 분명히 대책위원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시로코 테러에게 건네야 할 말은 「너는 피하고 있구나 (방어)」가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만나고 싶어 하고 있구나 (충동)」이다.

※ 이 교사의 대응에 초점을 맞춘 이벤트가 바로 『네버랜드에서의 술래잡기』였다.

https://note.com/kokonoe407/n/n95479117100c

어른의 책임 실천 (2)

또 다른 실천으로는(다른 대응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학생이 명백히 "색채"나 "색채와 같은 것"을 우선시하고 있을 때, 내적 충동을 우선해도 괜찮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해주는 것이 있다. 돌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이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것을 따라 하지 않을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아이는 '싫어'라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돌트의 정신분석』, 다케우치 켄지

누군가가 시켜서, 칭찬받기 위해서, 꾸중을 피하기 위해서 (타율적 동기)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동기를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 문제는 이 대응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와 깊이 연관된다.

반대로 금기시되는 행위는 「색채」로 느껴질 만한 규범을 강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는 ○○해야 하는 법이다」, 「사회인은 ○○해야 하는 법이다」, 「어른이라면 ○○해야 하는 법이다」와 같은 메타적 담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따라 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사회적 조화와 원활한 운영을 위해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학생들이 요구에 무조건 따르다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적절한 균형점을 함께 모색해주어야 한다. 학생이 왜곡되지 않도록, 어른으로서 이러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교사들이 실천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학생들을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는 대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블루아카이브에서는 유대, 추억, 「다정한 시간」 등의 키워드가 이러한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4th PV에 등장한 교사와, 스토리 내에서 어른의 책임을 실천한 아리스와 히후미의 구체적인 사례를 함께 살펴보자.

선생 (4th PV)

네 잘못이 아니야, 시로코

— 프레나파테스(선생)

말할 필요도 없이, 시로코 테러는 "색채"에 휩쓸리고 있을 뿐. 원래 시로코에게는 책임이 없었고, 이제는 벗어나도 된다고 전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TO 대책위원회)

책임은 내가 질게.

그게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니까.

— 전 학생회장?과 선생

(TO 보충수업부)

학생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꿈을

외부의 방해나 요구보다, 학생들은 내면의 충동을 더 소중히 여겨도 된다는 것.

(TO 아리스)

네가 되고 싶은 존재는 네가 스스로 정해도 돼

「색채」에 휘둘리기보다 내적 충동을 우선하도록 격려한다.

(TO 풍기위원회)

항상 노력해줘서 고마워.

메인 스토리에서 풍기위원회의 내면이 강하게 드러난 건 히나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말은 사실상 히나를 향한 것처럼 보인다. 히나는 「계속 칭찬받고 싶었어」라며 타의로 행동하는 느낌이 강했던 아이기에, 타율에서 자율로, 즉 "누군가 시켜서"가 아닌 "내가 하고 싶어서"로 이끌고 있는 듯하다.

미카는 '마녀'가 아니야.

「색채」처럼 느껴지는 존재의 제거.

(TO SRT)

다녀와. 만약의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외부의 방해보다 내면의 충동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샬레의 초법적 권한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겠지만……

(TO 아리우스 스쿼드)

앞으로 이어질 미래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엄밀하게 보면 이 말에는 근거가 없지만 선생님의 권위를 빌어, 「미래는 없다」는 「색채」적 담론에 짓눌리지 않도록 희망을 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아리스 TO 리오, 케이 (『최종편』)

최종편의 아리스는 "용사"답게 행동하며,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아리스는 자신을 겨냥했던 리오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케이와의 관계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대화를 시도한다.

리오는 하나코의 비유처럼 '외로운 왕'의 상태에 있으며, 고립되어 있다. 그녀가 최종편에서 키보토스 측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가장 큰 장애는――목적은 동일하게 키보토스를 지키려는 것이었지만――그 수단으로 아리스를 처분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리오 자신도 이 사실 때문에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리오의 모습을 안타까워한 아리스는 그녀를 "리오 선배"라 부르며,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던 사람"이고, "우리의 동료"라고 모두 앞에서 선언한다. 그것은 어딘가, 게임 개발부나 선생님이 「마왕」이었던 자신(아리스)을 받아주었던 순간처럼 보인다.

아리스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저마다 리오가 돌아올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리오가 이미 당연히 팀의 일원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하는 유우카. 왕이 외로운 왕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혼자 있는 것이 문제라면, 함께 맞아들이면 되지 않는가?) 라며 다소 감정적으로 말하는 히마리를 다독이는 하나코. 그리고 리오를 향해 끊임없이 애정 어린 장난을 치는 히마리 (비록 리오에게 그 애정이 잘 전달되지 않는 듯하지만) 등. 이렇듯 공동체는 리오를 용서하는 동시에, 리오가 자신이 용서받고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리오가 스스로 허락받았다고 느껴야만,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케이에 대해. 케이는 본래부터 아리스와 일심동체에 가까운 존재였다. 최종편에서는 아리스를 "왕녀"라고 부르며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아리스는 자신이 과거 "마왕"이라는 위치를 부여받고 괴로웠던 것처럼, 케이 또한 "KEY"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도구"로 정의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한다. 그리하여 아리스는 게임 개발부가 자신을 "AL-1S"가 아닌 "아리스"로 불러주었던 것처럼, 케이를 "KEY"가 아닌 「케이 (ケイ)」로 이름 붙인다.

「AL-1S」와 「KEY」라는 이름은 무명사제들에 의해, 말하자면 세상에 의해 부여된 상징적 이름이었다. 그 이름들은 "이름 없는 신들의 왕녀(=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자)와 그 열쇠를 가리키는 존재로서 규정한다. 하지만 "아리스"와 "케이"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 오히려 그 무의미함 속에 자신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여백이 존재한다. 아리스와 케이는 그 이름을 바꿈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써 내려갈 자유를 얻는다.

아리스는 이름 붙이기를 통해, 케이를 "KEY"라는 이름의 족쇄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L-1S"와 "KEY"라는 이름 아래에서, 두 사람은 '제3항목'(창조자: 무명사제)을 정점으로 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와 "케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무명사제를 무시하고―― 서로를 생각하며 이어지는 수평적 관계를 새롭게 호명한다. 케이는 애초부터 자신의 '사명'과는 별개로 아리스를 진심으로 걱정해왔다. 그리고 이제, 무명의 사제가 부여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도구"(= "KEY")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아리스를 아끼는 자신이라는 위치(= "케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 관계의 변화는 케이가 아리스를 부르는 호칭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왕녀"에서 "아리스"로―. 이것은 위로부터 강제된 '수직적 관계'를 벗어나,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연결되는 관계로 나아갔음을 상징한다³.

케이는 "KEY"로서의 사명보다, "케이" 로서 아리스를 생각하는 마음을 우선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서, 아리스를 대신해 자신이 희생될 운명 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태엽 감는 꽃의 파반느 편』에서, 표층 의식으로서의 "왕녀"가 사라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던 것은 "KEY"로서의 케이 였다. 그것은 사명에 따라 세계의 질서를 따르던, 지정된 도구로서의 케이였다. 하지만, 아리스를 소중히 여기는 '나' ―그 내면적 충동"케이"라는 이름 아래 결정(結晶) 으로 응집된 것일지도 모른다.